글쓴이 : 만땅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돼.
아내의 불평은 하루가 다르게 앙칼져 가고, 그렇다 해서 낚시를 그만 둬야 하는 내 인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어영부영 몇 달을 보낸 후 문득 기발한 영감이 떠올라 깨단해 졌다.
40여년이 지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최 주사의 일화'를 생각해 낸 것이다.
최 주사는 고을에서 소문난 수재였다.
일제때 대학을 나와 도청 계장직에 계시던 훌륭한 분이셨다.
해방이 돼 온 나라가 소용돌이 칠 무렵, 고을 갑부이자 한의원이시던 부친이
'아들이 친일파로 몰려 낭패 당할 것'을 우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라는 명령에 따라 지방으로 내려와 계셨다.
이분은 마침 나의 아버님이 장으로 계시는 어업조합(현재의 수협) 공판장 책임자로 일자리를 찾았고
남다른 재치와 해박한 지식을 바탕, 몇 년 동안 직장을 훌륭히 이끌었고 주위의 신뢰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다.
최 주사는 언제부턴가 술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건강한 체구인데다 과묵한 성격이라 오래지 않아 술은 말술로 늘었고, 술을 마신 후에는 거의 할말을 잊은 채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폭음에다 가슴앓이를 하시는 이유는 상당 기간이 지난 후 막연하게나마 시나브로 시나브로 주위에 알려졌다.
‘엘리트’ 관료로 장래를 촉망받던 자신만이 지방에 내려와 보람 없는 나날을 살아가야 한다는
좌절감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과거 부하이던 동료들이 과장 국장 도지사로 승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혼자 소외된 것만 같은 자신의 처지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
해장술이 소주 한 되, 아무리 많이 마셔도 자세나 언행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다 언덕에서 굴러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몇 달 동안 옴나위를 못하고 드러눕자 문병 행렬이 줄을 이었고 환자의 손을 꼭 잡고 당부하는 말들은 한결같았다.
"최 주사 웬 술을 그렇게 많이 드십니까. 그러다 몸 크게 다치고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 십니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거듭 되는 문병객들의 등쌀에 넌더리가 난 때문이었을까.
하루는 뺑 둘러앉은 이웃 일가친척들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좋소. 여러분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오늘부터 술을 딱 끊기로 결심했소. 사내가 결심한대로 실천을 못하면
그건 사내가 아니요" 했다.
상당 기간 주위에서 술을 권하면 "누구 다리까지 분질러 버릴 심보냐?"며 끝까지 고사했다.
혈색과 함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마음 다스림과 함께 일과도 하루가 다르게 상큼해져 갔다.
이를 지켜본 주위에선 "역시 큰 인물은 남다른 데가 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동네 아낙들은 "보이소. 당신도 최 주사처럼 심지 굳은 남자가 돼 보이소" 라며 다그치는 등 남편들을 주눅들게 했다.
어느 날 군수님이 검은‘지프’를 타고 간부들의 안내를 받으며 최 주사를 찾아 왔다.
지역 내 기관장 유지들이 뒤따랐고 많은 경찰관들이 호위했다.
"초도순시 차 두르는 길에 선배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선배님의 가르침이 밑거름이 됐습니다."
군수는 지방 유지들과 함께 최 주사를 제일 큰 요정으로 모셨다.
일제 때부터 기생들 예쁘고 노래 춤 거문고 등 실력은 동래 권번 출신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진 유명한 요정이다.
군수가 깍듯이 모시는 손님, 일류 기생들의 간 들어진 서비스, 요정 안방에선 최 주사가 즐겨 부르던
'선구자.새타령'이 밤새껏 흘러 나왔다.
이후부턴 최 주사의 술 상대가 기관장 지역유지들로 격상됐고 하루도 술자리를 거르는 날이 없었다.
"사나이 결심은 어디 가고 왜 또 폭음을 하고 다니느냐?"고 주위에서 따지자 최 주사는 천하제일의 명답으로 응수했다.
"그때는 안 마신다고 결심했고 오늘은 꼭 마시고야 말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한잔했다. 와!"
이 명답 아닌 명답은 찬.반이 엇갈려 한동안 지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엔 마누라 허파를 훽 뒤집어 내 '남편 낚시는 도저히 말릴 수 없다'는 체념을 유도해 보기로 작정,
최 주사가 써먹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나의 생일이 일요일이던 어느 해 6월.
"집에서 조용히 저녁이나 함께 하자"며 집안 동생들과 동서들을 부부 동반으로 모두 초청했다.
먹고 마시고 흥이 겹자 '돌아 와요 부산항'을 합창하고 "한 오백년'도 뽑아 제끼면서 젓가락 장단을 상이 부서져라 두들겨 댔다.
미리 허방다리를 놓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말은 막내 처제가 맨 먼저 꺼냈다.
"형부요, 일요일 날 낚시 안가고 가족들과 함께 지냉께 얼매나 재미있고 좋능교?"
속으론 '옳지 이때다' 하면서도 겉으론 처제의 말 한 마디에 큰 쇼크를 받은 것처럼 움찔 놀라며
"푸~!"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한 손은 양 눈을 감싸 이마를 가리고 또 한 손으론 주먹을 불끈 쥔 후 방바닥을 쾅 쾅 두드린다.
"내가 왜 진작 이를 깨닫지 못했던고!"
이 세상 더 없는 후회와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과 동작, 탤런트 뺨치는 연기를 한참 동안 계속 한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비장한 어조로 "좋다 까짓 거 내일부턴 절대 낚시 안 갈 끼다"
순간 온 집안이 터져 나갈 듯 박수가 쏟아 졌고
자식 놈들은 "아빠 생일에 엄마가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며 호들갑을 떤다.
"형부요 진짠교 진짠교?" 확인 또 확인.
"내가 언제 거짓 말 하는 거 봤나. 사내가 한 번 맹세한 걸 못 지키면 그건 병신인 기라. 병신."
나는 다짐 또 다짐.
이후부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신뢰가 무한해진 것 같았고
당시로선 상상 못할 거금인 35만원짜리 테니스 라켓을 선물하는 등 서비스 만점.
나로선 미리 계획된 수순임을 아내가 알리 만무다.
해마다 내 생일이 지나면 곧 바로 태풍을 동반한 긴 장마로 이어지고 감성돔 산란기 전.후라
줄잡아 40여 일 동안은 꾼들의 발이 묶이는 휴조기(休釣期)가 아니던가(장마는 6월10일게 시작 7월20일게 끝난다).
그 동안 나는 낚싯대를 어루만지며 한숨도 내쉬고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혼자 신경질을 부리는 등으로
낚시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사나이 신념 하나로 꾹 참고 견디는 척하면서 느즈러진 주말 보내기를 포개 나간다.
미리 짜 놓은 대로 친구들의 전화는 빗발치고 그때마다 능청스레 "나는 이제 낚시 끊었다".
드디어 장마가 끝나는 7월말, 이미 얻어 놓은 하계휴가 스케줄에 따라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
국토 최서단인 全南(전남) 苔島(태도)로 돌돔 낚시를 떠났다.
바위도 녹일 듯한 8월 햇볕은 가히 살인적이다.
하루 종일 사우나 하듯 땀을 쏟아야 하는 고통이 뒤따르지만
낚시를 담그기 무섭게 물고 늘어 지는 돌돔의 우악스런 입질에 혼비백산, 반쯤 넋을 잃는다.
일행들 몰래 숨겨 갖고 온 전복 미끼가 특효다.
일행들이 주로 쓰는 참 지렁이 미끼는 잡어 성화가 성가시고 돌돔도 잔챙이가 대부분 이지만
전복이나 소라 미끼엔 돌돔을 비 롯 혹 돔도 큰놈만 덮친다.
엔간한 역도 선수 보다 팔 힘이 세다고 소문나 있는 나도 끈질기게 파고들어 가는 돌돔의 당찬 힘에는 두 손을 들기 일쑤다.
아무리 낚싯대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속수무책. 장대가 부러지거나 줄을 터뜨리고 만다.
인간과 물고기가 벌이는 짜릿한 한판 승부야 말로 1년 내내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낚시 상사병의 근원인 것이다.
또한 낚시도 낚시려니와 즉석 회 안주에 두레 먹는 소주 맛, 불볕더위 속 얼음물에 탄 미숫가루 한 그릇 천하 일미다.
게다가 무인도에서 만 할 수 있는 알몸 ‘썬팅’, 엉덩이 앞뒤로 태양 에너지를 충적하면
겨우 내내 아랫도리가 후끈거려 속내의를 입지 않고도 추위를 모른다.
이래저래 돌돔 낚시는 수많은 꾼들에겐 일생 동안 한 번 맛 볼 수 있을까 말까 할 만큼 환상적인 낚시다.
진둥한둥 꿈같은 며칠을 보내고 나니 문득 겁이 덜컹 난다.
말없이 집을 나선 게 켕기기 시작, 가정으로 되돌아 갈 일이 꿈만 같다.
돌아 와 보니 예상대로 아내는 "배신을 당했다"며 길길이 뛰고 온 가족들이 합세, 집단 성토를 벌이기 위해 한껏 벼르고 있었다.
"아무리 사나이 맹세가 개 맹세라지만 남자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입에 거품을 문다.
이참에 고황에 든 남편 낚시병을 뿌리 채 뽑아 버리려는 듯 아내의 기세가 하도 딩딩해 두렵기까지 하다.
별별 소리를 다 듣고도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되자 "옳지 이 때다" 싶었는지 아내는 베란다로 가면 베란다로 따라와 시비,
욕탕으로 식당으로 안방으로 뒤따라 다니며 마구발방을 쏘아 댄다.
반나절 넘게 뜸을 들인 후 나는 양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아내를 쏘아보며 "이노무 여편네가 뒈질라고 환장을 했나?"
"그래 좋다, 니 말대로 나만큼 명세 잘 지키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가 생일에는 절대 낚시 안 간다고 맹세, 한 달이 넘도록 어김없이 지켰고 1주일 전에는 천하에 둘 없는 일이 생겨도
돌돔 낚시는 가고야 만다고 맹세. 그대로 실천했다. 왜, 왜, 왜…."
주먹으로 가슴을 쾅 쾅 내려치고 마구 손사래를 저어 가며 반격, 방문을 부서져라 '탕' 하고 닫아 버린다.
눈에 파란 불을 켜는 내 위세에 눌렸는지 어찌 보면 내 말이 '말 같잖은 맞는 말'같기도 하는 등
생게망게 해서인지 한동안 밖은 쥐 죽은 듯 조용해 졌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이마저도 '도로 아미타불'
아내는 불러도 대답 없이 말 대구조차 잊은 듯 걸핏하면 엉엉 울어 버리는 부작용을 덤터기로 뒤집어쓰게 됐다.
자다가도 울고 부엌에서도 울고 바느질하다 울고 전화하면서 울고 밥 먹으면서도 운다.
이때 나는 말로만 들었던 '여자 눈물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4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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