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초 저녘입니다.
오후5시, 날이 화창했으면 집 문 밖에 나가서 날아 올 기러기 없어 그냥 지나치는 우체부 아저씨라도 기다리곺은 시간입니다.
독수리 타법으로 하도 오래 자판 두들기다 보니 저가 쓴 글도 여러번 많이도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경붕사 선 후배 회원님, 전 오늘 밤 새워서라도 이 사연 끝까지 써 보려 합니다.
늙어간다는 건 서글프지 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농도 짙게 애틋 해 지는 그 옛날 사랑했던 아름다운 사연 때문에 서글프다 여겨질 겨를이 없습니다.
이토록 갈수록 더 새록 새록 해 질 사연일랑 잊기가 아쉬워 잊어서는 안되기에 세월이 빨리 갔으면, 차라리 늙어버렸으면 그래서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러나 죽기전 또 죽어서도 간직 하고픈 내 마음속 사랑했던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살아라도 있는지 알지를 못 합니다.
이름이 많아서 지금도 정확히 모릅니다.
물으려도 알려고도 하지않던 여린시절, 무작정 니캉 나캉 마주만 봐도 그렇게 흐뭇했던 세월 이였습니다.
저가 1959년 용두산 공원 남쪽 끝 밴치에 앉아 그때 그 소녀에게 부쳐 준 이름은 '영아'였습니다.
'영원히 아름다운 내 사랑' 그래서 전 그렇게 불렀고 그 소녀는 스스럼없이 녜 하고 다소 곳 했습니다.
저가 그 소녀를 처음 만난 건 군에 있을 때 였습니다.
대학 다니면서 명동에서 빠찡코를 하다 큰 사고를 저지른 후 군에 입대해 처음 자대 배치된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위병소에 근무 할 때.
고교시절 꿈 많던 시절, 우연히 오빠를 면회하러 온 친구를 따라 부대로 찾아 온 그녀를 정문에서 만났습니다.
그 뒤로 때로는 친구와 때로는 혼자서 부대를 찾아왔습니다.
용케 저가 정문 근무를 설 때 마다 알고 오는 것 같았습니다.
올때 마다 방문자 성명란에 기재한 이름이 달랐습니다.
경선, 숙자, 용문.
옆구리에 끼고오는 책도 다양했습니다.
때론 릴케 한용운 소월 시집도 함께했고 어떤때는 큼지막한 대학노트에 빼곡히 적은 일기장도 들고 왔습니다.
일기장 겉장에 적힌 이름은 '이 용문' 그래서 저는 그게 그 소녀의 이름인 줄 알고 한동안 '문아' '문아'그렇게도 불렀습니다.
소녀는 절 오빠라고 불렀습니다.
대학시절 학생이면서도 활동이 다양했던 저는 당시 민의원(지금의 국회의원을 내각 책임제로 바뀐 5대 부터 당시 그렇게 개칭했음) 비서도 하고 전국 대학생 정치학과 연합인 '정우회' 회장도 할 때 였습니다.
5.16군사 혁명이 나자 저는 반 혁명 주요인사 수배자 1순위 였고 그때 끌려가면 무조건 국토 개발대라는 인간 개조공장에 강제수용 될 땝니다.
한적한 저수지에서 낚시도 하고 오징어 채낚이 배를 타고 숨어다니는 등으로 교묘하게 검거를 피해 다니면서 5년이 지났습니다. 자연히 그녀와도 멀어졌고 잊혀질 뻔 했습니다.
저가 삼천포에서 직장 근무를 할 당시 천하가 시끄러웠던 큰 사건이 터져 제 이름이 신문에 부각되면서 그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문아는 너무 예뻣습니다.
키도 훌쩍 자란 것 같고 그동안 다른 여자들에게서 눈 여겨 봤던 두 다리는 길쭉하고 곧게, 엉덩이는 볼륨있고 두툼하게 선이 너무 뚜렸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함께 저의 가슴과 마음은 뜨거운 모닥불에 데인(달리 표현이 안됨)것 처럼
저는 안정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함께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스무 여덟 살 되던 해 였습니다.
어머님이 펄쩍 뛰셨습니다, 집안 근본도 모르지만 이빨이 팔자 사납게 생겼다는 겁니다.
송곳니가 살짝 덧 나 있는 그녀의 치아는 가지런하고 웃을 때 너무 예뻣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밤 새 함께 울면서 하늘도 원망하면서 그렇게 헤어지고 그녀는 스물여섯되던 다음 해에 저는 서른하나이던 삼년 후에 서로 알지 못한 채 결혼을 했었나봅니다.
그 후 15여년이 지나고 극히 우연 한 시기에 뜻 밖의 장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40대 중반 한창 잉어 낚시에 정신 못 차릴 때 였습니다.
일요일 하오 대동수문 큰 강에서 합봉낚시로 두자가 넘는 잉어를 낚아올렸을 때 둘러 싼 여러명의 구경꾼 중 그녀의 얼굴을 봤습니다.
3명 자녀의 엄마가 된 그녀는 옛날 오빠가 낚시를 즐겼으니 휴일이면 분명히 어디에선가 낚시를 할 것이라는 짐작으로 당시 꾼들이 붐볐던 구포 다리로 엄궁 샛강으로 막연한 나들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처음 대동 수문으로 산보 겸 해서 나왔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 만큼 큰 고기를 낚았다면 분명 오빨거간 생각이 들어서 뛰어왔다고 했습니다.
그 후론 만나면 만날수록 할 말도 많아지고 정도 깊어졌습니다.
세상사는 얘기며 새끼들 키우는 얘기, 싸르뜨르 도 키에케골 도 단골 메뉴였습니다.
그녀는 저가 만난 이 세상 어느 여인 보다도 두뇌가 예민한 여인이었습니다.
지금 되씹어보면 부끄러운 생각이었지 만 그때는 만약 그녀와 내가 결혼해서 2세를 낳는다면 이 세상 제일 머리 좋은 공부 잘하는 그런 자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여지껏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말없이 아니 기다렸던 말 한 마디를 남기곤 훌쩍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고도 오늘 또 한번 1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녀를 떠나보낸 건1996년 10월23일 늦은 밤, 부산역 앞 광장 분수대 앞 돌계단에서 였습니다.
그날 처음 그녀는 40여년 만 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오빠와 함께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서울 명문대학서 공부하는 막내가 아파서 급히 가 봐야한다며 기차를 탓습니다.
그러곤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며칠 후 집으로 전화를 했으나 번호도 바뀌었습니다.
나는 믿지도 않으면서 성탄절 온 밤을 함께 기도했던 그, 그녀가 다니는 천주교 성당 문 앞에서 며칠을 기다렸으나 얼굴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죄인처럼 무거운 낚시가방을 들쳐메고 하염없이 강둑길을 자주 걷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끝나기 전 한번 쯤 아니 단 한번만이라도 까마득 한 옛날 대동수문에서 엉겁결에 들었던...
"오빠~" 그 목소리가 미치도록 날뛰고 싶도록 듣고싶어 울고싶습니다.
아니 울고 또 울고있습니다.
아무리 주렴들치고 생각 해 봐도 이 못난 하소연은 띄울 수 있는 곳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울 경붕사 선 후배 여러 회원님 못난 이 늙은이 흉 보시며 혀도 끌 끌 차시며 안주꺼리 될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젠가 어디엔가 남겨야 할 것 같아 이 글 씁니다.
하찮은 하소연 너무 길게 느러뜨려 너무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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