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만땅
32톤 고래를 낚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학교 후배인 일요낚시 白種國사장의 끈질긴 부탁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얼마 전 일요낚시 복간준비지 2호에 실린 '죠스를 낚았다'는 글이 내 오기를 박박 긁었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신문사 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거쳐 지금은 어느 지방지 편집국장으로 있다는 趙敦萬씨가
내 횟간을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다.
젊은 시절 각각 다른 신문사 경쟁지에서 일선기자 생활을 할 때부터 함께 뛰고 함께 마시고 뒹굴던
趙국장을 못 만난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낚시 잡지에 느닷없이 '죠스를 낚았다'는 글이 실렸으니 우두망찰할 수밖에!
趙국장은 타고난 글쟁이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특유의 유머 감각과 폭넓은 대인관계 등으로
나는 기사를 쓰거나 교제를 할 때도 번번히 당하기만 했다.
같이 술을 마시면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소문난 술고래인 내가 먼저 나가 떨어졌고 같이 ‘테니스’를 배울 때도
만능 ‘스포츠맨’으로 자부하던 내가 스승과 제자 꼴로 결말지어지곤 해 난 한 번도 한 가지도 趙국장에게
이겨본 적도 이겨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낚시에 관한 한 나는 천하의 ‘베테랑’ 꾼으로 자처해온 터.
이 분야만은 아무리 날고 긴다는 趙국장도 넘볼 수 없겠거니 했는데 아 글쎄 꿈에서나 환상 속에서나 경험해 봄직한
‘죠스’를 낚았다니 어안을 벙벙 거릴 수밖에....
에라, 기왕지사 이빨 악다문 바에야 독자들이 믿어주던 말던 ‘죠스’ 보다 몇 백배 덩치가 큰 고래를 낚았다 고
“찍” 소리라도 한번 질러 봐야지 한 것이다.
일시: 1984년 8월 12일 상오 9시 50분.
장소: 경남 울주군 강동 면 동북방 70마일 해상.
채비: 직경 8cm 길이 2백50m 로프. 길이 1.5m 직경 7cm 무게 50kg 작살 낚시 포.
소요시간: 3시간 15분.
조사: 제3어승호 선장 朴 漢佑. 兪 南出포장 외 선원 9명. 필자 및 부산일보 朴 在正 사진기자 등 총원 13명.
어 종: 긴 수염고래(일명 장수 경). 길이 20.2m 무게 32t,
고래다!
10m 높이의 ‘마스트’ 부분 전망대에 매달렸던 관측 사들의 고함 소리가 이른 아침의 고요한 바다 공기를 찢는다.
1984년 8월 12일 새벽 6시 25분. 울산 동북방 장생포 기점 75마일 해상.
최신형 포경선인 제3어승호(98.7t 기관 1천1백 마력)엔 갑자기 전운 같은 긴장이 감돈다.
배 오른쪽 5백m 전방 해상에 무려 10마리 이상의 고래 떼가 나타난 것이다.
각각 제 자리에 배치된 선원들이 날렵하게 움직인다.
'스타보드 엔진 풀 아이도우'(전속 우현으로).
朴선장(55. 울산 시 야음 동 402)의 지시에 따라 배는 얼마 뒤 고래 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50m 앞뒤로 분수 같은 물기둥이 솟고 "푸 퓨" 고래들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하다.
兪포장(53.울산 시 방어 동 670)이 작살 포를 고쳐 잡는다.
그러나 고래들은 여기저기서 1～2초간 불쑥 불쑥 솟아오를 뿐 발포 거리인 30m 이내론 접근을 않는다.
"저 놈이다."
"소나(음파 발사 기)를 넣어라."
兪포장의 지시대로 음파 발사 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고래 떼가 후닥닥 놀라 물위로4～5m나 솟구쳤다 달아나기 시작한다.
어승호 는 전속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재래식 포경선들은 살금살금 고래에 접근. 작살 포를 쏘았으나 성공률이 희박해 최근에는 고래가 가장 싫어하는 음파를 발사,
도망가면서 지치도록 한 후 추적해서 잡는다.
“수중에 음파를 보내면 고래는 고막이 찢어지는 듯 한 고통을 겪게 돼 무조건 다라난다”는 게 兪포장의 설명.
도망가는 고래의 속력은 25노트 정도, 어승호의 전속은 18노트다.
배의 속력은 고래 보다 뒤떨어지지만 오랜 경험으로 고래의 진행 방향과 도주 습성을 훤히 알고 있는 선장과 포장은
지름길로 고래를 쫓는다.
그러나 고래와 어승호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쫓고 쫓기는 필사의 ‘레이스’를 벌인지 1시간 10분, 고래는 숨이 차는지 자주 물위로 솟고 속도도 눈에 띄게 둔해졌다.
兪포장은 고래가 솟구침직한 해면에 미리 배를 멈추게 했다.
1분이 채 흘렀을까 말까 거대한 고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 앞쪽을 가로지르는 사이 "꽝"하는 포성과 함께
길이 1.5m나 되는 작살 포탄이 '푹'하며 고래 등에 깊숙이 박혔다.
어창에 사려둔 직경 8cm나 되는 ‘로프’가 쉴 새 없이 풀려 나간다.
윈치에 연결된 ‘로프’는 2백m 이상 풀려 나갔고 고래는 포탄에 연결된 ‘로프’를 매단 채 무서운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20여 분간 달아나던 고래가 멈칫해 하며 어정거리자 선원들은 ‘윈치’를 역회전 시켜 슬슬 ‘로프’를 감기 시작했다.
순간 큰 배에 "덜컹" 하는 충격이 오면서 배가 한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툭"하고 '로프' 중간이 끊어져 버렸다.
물이 배이면 5t 정도는 됨직한 100여m의 무거운 ‘로프’를 매단 채 고래는 다시 새로운 속력으로 내빼기 시작했고
배는 또 전속으로 뒤를 따랐다,
실뱀처럼 긴 ‘로프’가 물 속에서 섬광처럼 지나간다.
가늘고 질긴 ‘나일론’ 줄을 쓰지 않고 굵고 무거운 ‘마닐라로프’를 사용하는 것은 ‘로프’가 물에 젖으면
엄청난 무게가 생겨나기 때문에 이를 매달고 내빼는 고래가 쉽게 지치기 때문이라는 포장의 설명이다.
그래선지 고래의 속도는 처음 같지 않았고 숨쉬기 위해 물위로 솟구치는 시간도
처음 5분 간격에서 1분. 50초 .30초로 차차 짧아지기 시작.
재 추적이 시작 된지 35분 만에 2번째 포탄을 쏘았다
또 명중!
이번에는 맥을 못 추겠지 했으나 5분 후 밍크고래용 가느다란 ‘로프’도 맥없이 또 끊어져 버렸다.
아무리 거대한 고래라지만 이처럼 무시무시한 힘을 낼 수 있을까. 가슴 죄며 지켜보던 필자는 덜컥 겁이 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래 배 사나이들의 집념은 끈질겼고 당황하지 않았다.
10여분 후에는 다시 밍크용 나일론 로프로 제3탄을 쏠 수 있었다.
그래도 안심을 못한 兪포장은 가까운 곳을 지나던 제2청구 호에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 확인 사살을 하도록 해
거대한 고래를 배 옆구리에 매다는데 성공했다.
비로소 선원들은 환호의 만세를 불렀다.
인간과 고래, 두 위대한 동물끼리의 승부가 판가름 난 것은 상오 9시 50분. 길이20.2m. 무게 32톤이나 되는 수놈이었다.
고래가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해 고래 복부에다 구멍을 내고 ‘콤푸레셔’로 30분간 공기를 넣은 후
장생포 항으로 고래를 예인, 귀항하는데도 7시간 이상 걸렸다.
어승호가 어청도, 흑산도를 둘러 동해까지 고래를 찾아 나선 지 13일 만이었고 필자가 기자로선 처음으로
고래 잡는 광경을 취재하기 위해 울산에 있는 선주 李 千成씨(58)의 양해를 얻어 대흑산도에서 어승호에 동승 한지 8일,
7백‘마일’의 긴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생생한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던 ‘드라마’ 같은 한판의 승부였다.
며칠째 날씨가 나빠 고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을 때 는 진망궂은 신문쟁이가 고래 배에 올랐으니
부정을 탄 게 아닐까도 싶고 진득하니 앉아있질 못 하는 성미인데다 며칠씩 뙤약볕 아래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행여나 물이구럭 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했던 찝찝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환희로 바뀌는 짜릿한 순간을 맛 볼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해가 질 무렵에야 장생포항 고래 위판 장에 올렸으나 값은 고작 1천6백만 원 밖에 받지 못 했다.
평소 6천만 원 이상 호가하는 장수 경 값이 이처럼 떨어진 것은 해체 시설이 부족한 장생포 항에 이날따라
장수 경 3마리 밍크고래 1마리 등 모두 4마리가 한꺼번에 잡혀 올라왔기 때문이다.
또 이처럼 고래가 무더기로 잡히기도 4년만 이라는 것.
장수 경 한 마리 해체하는데 만도 빨라야 두세 시간씩이나 걸리기 때문에 제때 해체.
토막 낸 고기를 늦기 전에 냉장 시설에 보관해야만 변질을 않는다.
고래가 많이 잡히고 냉동 냉장 시설이 가득 차고 나면 아무리 애써 잡은 고래라도 토막 내 바다에 실어다 버리거나
땅속 깊이 묻어야 하기 때문에 그 경비 또한 엄청나게 소요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럴 경우 돈 한 푼 구경 못하고 경비만 손해 볼 뿐만 아니라 썩은 고래 고기 냄새가 항구에 진동하고
당국의 허가까지 얻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 짝이 없다.
낚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내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별별 낚시도 다 해 보았고
깊고 얕은 팔도 인심을 두루 두루 겪어 봤지만 고래 배 사나이들의 인정과 의리는 감동, 감격 그 이상 달리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비록 고래 값은 3분의1도 채 받지 못했지만 곰살궂은 선장과 포장 이하 전 선원들은 한결같이
'복딩이가 한배를 타 모처럼 귀한 장수 경을 잡을 수 있었다'며 흡족해 했고 해체 장 에서 가져온
고래 정수리 살점을 너비아니 굽고 달보드레한 육회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새껏 육자배기를 불렀던 기억은
여느 낚시로써는 도저히 맛볼 수도 겪어볼 수도 없는 환희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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